왜 살아야 하는가 - 미하엘 하우스켈러
2023-10-19
왜 살아야 하는가 - 미하엘 하우스켈러
‘삶이 싫어지는 저녁에 이 책을 읽는다.’ - 김겨울
즐겨보는 겨울서점의 추천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다.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무릇 나만의 질문이 아닐 것이다. 인류의 오랜 질문, 풀리지 않을것을 알지만 놓을 수 없는 곧 우리 실존에 직면한 문장이다.
이 책은 위 질문이 꼭 필요한 질문이면서 우리를 허무주의로 이끈다고 말한다. 모든것이 의미없고 그저 그렇게 되는 시점은 저 질문으로부터 온다. 마치 하얗고 거대한 고래가 바다를 잠식하듯. 이렇게 우리를 무너트리고자 하는 것들에 반대에 서서 곧게 서있는 법을 가르치려고 한다. 10명의 철학자, 시인, 현자들이 남기고간 유산으로 고래로부터 인간을 지치고자 한다. 실존의 중심에서 세계를 대항하는 것. 난 이 책에서 얻으려고 했다.
1. Schopenhauer -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악의 세계
이세계는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선의 세계인가 최악의 세계인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이 궁극적으로 더 큰 선의 실현을 위해 존재하는 듯 보이면서도 그 악들은 결코 해소될 수 없고, 오히려 세상에 존재하는 선보다 크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악한것들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삶은 회피 가능할 만큼만 우연히 고통스럽지 않다. 필연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고통스럽다. 고통 그 자체이다. 우리는 존재로의 의지(will to live)를 가지고 살아가지만(본질적으로 모든 욕구가 여기에서 파생되지만) 필멸의 존재이다. 더욱이 ‘존재함’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할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원론적인 행태를 보면 인간은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닌거 같다.
그는 ‘존재로의 욕구’에 더 깊은 의미를 둔다. 의지가 곧 물자체이고 내적 내용물이자 세계의 본질이며 눈에 보이는 세계와 현상은 의지의 반향에 불가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의지를 표출할줄만 알고 어떤 고등한 목표도 수행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삶이랄 것이 결국 무의미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고통받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진정한 철학이라고 할만한 것은 인간의 필멸성을 이해하고 고통을 경험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다. 고통이 없으면 철학도 없다. 어쩌면 형이상학과 종교도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의지일 수 있다. 실제 세상이 내가 느끼는 것과 다른, 고통이 없다는 안심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필히 고통받는 존재임을 안다. 존재하기를 의지하지만 정작 그럴 필요를 알지는 못한다. 인간은 그런존재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리는 우리 죽음에 동일하게 무관심으로 대응해야 한다. 매일 우리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오물처럼 우리 몸의 죽음에 무관심 해야한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가 될 것을 두려워하지만 사실 우리가 과거와 미래의 존재가 아님을 직시해야한다. 우리는 현재의 존재이며 현재에만 살 수 있다. 더불어 우리는 우리 없이 살아갈 세계를 끔찍하게 여긴다.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인식하는 존재가 사라진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세상이 우리를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세상에 선행한다. 살아있다는 것 만으로 나는 곧 너고 너는 곧 나다.
우리는 우리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때 가장 행복하며 어떠면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우리는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 존재로 의지가 없다고 느껴야 한다. 삶의 진정한 목적은 의지의 부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2. Søren Kierkegaard - 신에 결속되어 사는 침묵의 삶
****키르케고르는 강한 기독교 신자로 삶의 의미를 기독교 안에서 찾아내려 했다. 그러나 여타 기독교인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독실한 신자, 목사 등이 되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신이라는 존재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했다. 믿음을 외치던 전세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실존에 세가지 실존 영역이 있다고 말했다.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이 그것이다. 심미적으로 삶을 사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혼자이다. 세계를 쾌락의 수단으로만 생각해 덧없는 관계만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아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저 관심과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 변화를 반복할 뿐이다. 이들은 적당히 기억하고 적당히 망각하는 법을 터득해 마치 놀이하듯이 살아간다. 그는 이런 삶을 ‘절망에 가깝다’고 한탄했다. 모든 즐거움이 결국은 실망스럽기 때문이다.
윤리적으로 살아간다면 어떨까. 키르케고르는 윤리적실존이 심미적생활양식을 보충할 뿐이라고 말한다. 심미적 선택은 우리를 결속시키지 못하지만 윤리적 선택은 우리를 결속시키고 진정으로 우리를 소유하도록 한다. 그래서 심미적자아와 달리 윤리적 자아는 자유롭다. 전자가 반복을 견디지 못하는 것과 다르게 후자는 반복을 발판 삼아 긍정으로 끌어안을 줄 안다. 우리는 각자 소명을 가지고 살아가며 스스로 소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종교적 생활양식은 어쩌면 윤리적 생활양식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윤리적 실존이 모든 인간과의 유대관계에 기반한다면 종교적 실존은 신과의 유대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적 실존이 여전히 유동적이지만 종교적 실존은 우리를 영원한 힘에 결속시킨다.
우리가 진정으로 영원한 힘에 결속되어 살고 싶다면 우린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저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만 움직이며 결속된 상태로 인간의 이성을 거스를 줄 알아야 한다. 침묵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우리가 주인이 되는 길이다.
3. Herman melville - 이방인 처럼 살아가는 법
허먼 멜빌은 ‘모비딕’의 작가로 유명하다. 공포를 표현하는 특유의 문체와 이야기가 전쟁의 참사를 겪고난 시민들의 마음을 동조 시킨걸까. 그는 여러 방면에서 두려움을 피해가는 인물을 그리며 우리에게 현명히 살아가는 길을 보여준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정해진 세상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세계라는 사기꾼에 놀아나고 있으며 자신이 보고싶은것을, 엄밀히 말해 자신이 어떤사람인지에 따라 익숙하게 길들여진 것을 본 셈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바람과 두려움과 관심과 집착이 투영된 결과물을 볼 뿐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투영이 세상 그자체 일 수 있다. 그저 무엇을 찾는지 모르면서 계속 찾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투영으로 보여지는 세상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세상은 두려움으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이는, 느껴지는 세상을 불신해야할까? 이것을 절대적 가치와 Static하다고 믿는 것은 많은 문제를 초래한다. 그러나 믿음을 빼놓고 인간의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정확히는 ‘좋은’ 인간의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무신론은 인간에 대한 불신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면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법을 찾아야 한다.
소설 모비딕에서 하얀 고래의 두려움에 가장 적절히 대응하는 인물로 이슈메일이 그려진다. 이슈메일은 세상을 장난처럼 받아들이는 인생관이 불러일으키는 유쾌한 무심함, “자유롭고 편안한 느낌의 무법자 철학”을 환영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이방인’ 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일부가 되지 않은 채 사계절 내내 자신만의 온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방인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소화하는 배우이며 연기를 굉장히 잘하지만 그렇다고 그 역할에 스스로를 잡아먹히지 않는다. 다가오는 세상에 유연하게 비껴까는 것. 너무 진지하지 않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 우리는 이슈메일처럼 살아가기를 고려해볼만 하다.
4.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 더이상 사랑할 수 없다면 그곳은 지옥
솔직한 고백을 적자면 네번째 이야기인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세계를 적는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 이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책을 읽을 때 마음을 크게 흔들지 못했고 그저 지나가는 한 이야기 정도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부분을 정리하려고 하자 어쩌면 피로함이 몰려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밑줄 친 부분들을 읽어보면서 도스토옙스키의 철학관이 던지는 질문이 나와 닮아 있다고 느꼈다. 이 책을 읽은 뒤 시간이 흐르면서 닮아간건지, 아니면 원래 닮아있던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사람이 나에게 중요해졌다는 것은 확실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보면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들이 많다. 살인을 당하기도 자살하기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자살하는 인물에 주목해야 하는데 그들을 현생에 불행과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듯 자살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 인간의 삶이라는 제약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외치는 듯이 목숨을 끊는 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평가적 허무주의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살아가야할 이유마저 없으니 그냥 죽어버리겠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살인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다른사람을 죽임으로서 보편적인 도덕관념에 제약받지 않는 존재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 후에 이어지는 자살은 자신의 욕망과 삶에대한 의지를 초월한 존재임을 보이려는 것이다.
과연 이들은 용감한 사람일까. 우리는 가지고 있는 제약을 그들이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선망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무책임한 죽음을 답으로 내놓기 전에 여러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우선 우리가 실제로 삶의 욕망을 느끼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가 이성으로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음을, 도덕적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고 하자. 그것을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도 정말 삶을 욕망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은 그럴 수 없다. ‘삶을 욕망해야할까?’라고 질문하는 존재는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진 존재이다. 애초에 그런 질문이 성립하지 않는 존재만이 삶에 대한 의지를 버릴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욕망이 없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제약이나 불완전함을 지니지 않은 것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사유하고 고민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통 없이, 인간적 한계가 없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의미가 없다.
이런 고민을 거치면 삶을 포기하는 것은 삶을 유지해나가고 끝없는 고통의 풀을 헤쳐나가는 것보다 편하고 쉬운 길이다. 자살을 택하는 그들은 용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몹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삶을 살아가야할 이유를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그런 지침을 받지 못하면 쉽게 살아가지 못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사랑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추상적으로만 존재하는 ‘인류 보편에 대한 사랑’ 이 아니라 철저히 개인간의 사랑, 개개인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사랑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과 감정을 완전히 공감,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도 마찬가지이다. 또 언젠가 끝날 감정이라는 것을 안다면 상황은 더 비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들끓기만 하는, 욕망만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적 사랑을 해야한다. (종교적 의미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과 불완전함. 그 나약함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더라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 평가하고 잣대를 들이밀며 점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대중이 일반적으로 외쳐온 사랑은 ‘지배욕’ 일지도 모르겠다. 남을 통제하고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려는 과정을 ‘사랑’이라고 이름 짓는다면 인간은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리면 결국 삶을 비관하는 지도 모르겠다. 지옥은 그런곳이다.
5. Lev Tolstoi - 피할 수 없는 모든것의 끝
논외의 내용이지만 앞선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동시대의 러시아 작가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부족한 삶을 살았던 것에 비하여 톨스토이는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도스토옙스키는 살아생전 자신보다 먼저 주목받던 톨스토이를 질투하고 라이벌로 삼았다는 일화가 있다.
말했듯이 톨스토이는 부족함 없는 배경에서 자랐다. 많은 재산과 성공한 작품으로 얻은 명성은 그를 부족함 없게 만들었다. 모든게 완벽해 보이는 삶에서 그는 권태와 무력함을 느낀다. 학자들이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투쟁했을 때 찾을 수 있는 진리가 ‘진리는 없다’ 가 유일한 것 처럼 톨스토이는 삶이랄 것이 거대한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한다.
그를 완벽한 인생으로 인도할 것만 같던 부, 명예, 지식, 능력은 그를 두려움으로 몰아 넣었다. 삶이 결국 끝날 것이라는 죽음의 속삭임이 그를 잠식해갔다. 실제로 권태를 강하게 느낀 톨스토이는 죽음으로만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질뻔 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더 건강한 답을 찾아 나선다.
그는 자신이 가진 부, 명예, 지식이 가치없다는 것을 담대하게 인정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회복하려고 했다. 오히려 ‘인생을 살아야 할 절대적인 이유와 가치가 있을거야.’ 라고 말하는 귀족들의 생각에서 벗어나 삶 자체를 긍정하는 믿음을 가지려고 했다. 믿음은 유한과 무한을 이어주는 지식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믿으면 그 가치는 유한한 삶에서 무한한 경험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런 자세를 평범한 노동자 계급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고통받지도 권태하지도 않는다. 그저 사는 것이다. 불평없이 주어진 인생을 소화하는 존재들이다.
삶의 의미를 뜯어서 분석하려고 하면 그 자체가 망가지는 경우가 있다. 괜찮은 삶을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 오히려 망가진 시계를 가지고 돌아오는 격이다.
톨스토이 또한 삶의 의미를 찾는데 대해서 이성이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 의미를 밝히기는 커녕 숨기는데 기여한다고.
톨스토이 부분의 글을 읽으면 참 좋은 문구가 많다. 감히 내 작문능력으로 비슷한 느낌을 못낼것 같아 아래는 인용문으로 대체한다.
의미는 부서지기 쉽다. 믿음은 깨지기 쉽다. 절실하게 무언가를 알려고 하는 것보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흐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더 괜찮은 삶일 수도 있다.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와는 다르게 개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류애, 아가페적인 사랑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품에서도 육체 간 사랑에 혐오감을 내비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종교적 영향을 많이 받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6. Friedrich Wilhelm Nietzsche - 위험한 삶이 가져다주는 즐거움
니체.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철학자이다. 가장 먼저 접한 근현대 철학자이면서 훈련소 기간을 버티게 해준 은인같은 사람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강하게 만들 뿐이다’, ‘운명을 사랑하라’ 와 같은 격언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서 끓고 있다. 감히 애정한다고 말할 수 있는 니체의 철학을 또 이 책에서 읽는다.
‘신은 죽었다’ 니체의 유명한 말이다. 사회가 인본주의로 돌아서는 시점에 서있던 니체는 지금까지 신이 우리에게 주어주던 것들을 인간의 것으로 돌리기 위해 깊이 연구한다. 창조하려는 자 파괴하라!’ 라고 외치던 것은 기존의 종교에 대한 믿음으로 작동하던 우리를 바꾸기 위해선 종교를 타파해야 한다고 외치던 것이다.
즉 니체는 신 없이도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초인’으로 거듭나기를 원했다.
초인은 스스로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 자신의 도덕체계를 구축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기존에 주어진 도덕을 따르던 사람들과는 구분되는 점이다. 더 나아가 니체는 기존의 도덕을 ‘노예도덕’ 이라고 칭한다. 남을 배려하고 연민하고 탐욕은 나쁘고 절제해야 하는 것이 노예들, 가지지 못한 자들이 그 불평등을 저지하거나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르상티망으로 소개되는 이 개념은 기독교적 교리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지적한다.
즉 도덕은 사람을 순응하도록 만드는 독과 다름이 없다. 오히려 자신이 주체적으로 삶을 구성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더 많은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그 고통들이 해소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인생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이미 주체성을 갖춘 초인은 고통이 자신을 굴복 시키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며 오히려 더 큰 폭으로 나아갈 수단과 힘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도덕은 정확히 말해 노예도덕은 진리가 아니다. 우리의 욕망을 잘못 표출한 결과 욕망을 억누르는 방향으로 세상이 설계 된 것이다.
니체는 귀족도덕의 부활을 원한다. 강한 것이 도덕적인 것이다.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욕망에 내뱉는 노예도덕이 아니라 진정한 강함으로 부터 오는 지배력. 지배로의 욕구를 신성하게 여긴다. 세상은 평등할 필요가 없으며 우월함과 열등함은 필히 존재해야 한다. 그 계급의 낙차에서 오는 투쟁과 갈등. 끌어올림과 밀어내림이 우리를 진보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인류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영원회귀 사상은 이런 자기초월적인 자세와 희생에 용기를 더한다. 세상이 사실은 되풀이 되는 형태이고 우리가 사는 삶이 다른 사람의 경험과 구분할 수 없다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최선의 방향을 살아야 한다는 해석은 우리가 주어진것을 파괴하고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을 긍정하게 만든다.
7. William James - 구체적인 세계의 극적 풍성함
미국의 철학자여서 일까. 윌리엄 제임스가 손에 쥔 실용주의는 꼭 지금의 미국을 닮아있다. 원인보다 결과에 주목해야 한다는, 결과에 유의미함이 없으면 실질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질문이라는 입장이다.
이 문장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떠오르게 한다. ‘중력과 가속운동은 구분할 수 없다.’ 동일한 결과를 만드는 두 요인을 우리는 구분할 수 없고 구분할 수 없는 두 객체는 사실상 동일한 것이라는 논리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 방식을 삶의 의미와 철학에도 적용시켜 쓸데없는 고민만 늘어놓는 형이상학적 사색을 극복하고자 한다. 절대적인 가치나 주어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재된 것들의 실체를 인정함으로서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치열한 논증을 통해 정답을 찾을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직접 경험하면서 내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감각 하는 것이며 그 자체로 실재한다는 입장이다. 우리가 이성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정말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는 경험주의적인 입장으로 확장된다.
물론 윌리엄 제임스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축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합리주의를 비판하지 않았다. 두 사상의 독립성과 가치를 인정해왔다.
건강한 정신 ”healthy mind”과 병든 영혼 ”sick soul”
그는 합리주의를 면전에서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합리주의적인 사고를 고집하는 이들에게 들이닥칠 위험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들이 삶에 있어 진리를 쫒는다면, 그것에 악착같이 집착한다면 스스로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명확한 진실이 없다는 것이 명확한 진실이며 우리는 매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을 뿐이다. 대립되어 보이는 두 성질은 실제로 구분도 할 수 없고 본질적으로 하나일 수도 있다.
악 자체는 악하지만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악하지 않다
8. Marcel Proust - 진정 삶을 살았다고 할 만한 유일한 삶
마르셸 프루스트의 대표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총 10권의 연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대한 양의 장편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이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모두 결국 혼자일 뿐이다. 소설은 보통 현재를 붙들고 있을 수 없다는 사실과 과거를 다시 돌려받을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로인한 상실감과 회한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한평생 말을 한다 해도 우리는 한순간의 공허를 무한히 반복하게 될 뿐이다.
프루스트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친밀감이 환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고 그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심지어 자신을 속여가며 우정 사랑을 삶의 의미로 내세우지만 결국 홀로 존재할 뿐이다. 그는 이런 현상을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보았다.
그렇다고 프루스트가 사랑이 필요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사랑은 우리 본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도구이고 사랑이 일지 않았더라면 숨겨져있었을 우리 존재의 측면들을 탐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역설이다. 우리가 소유하기를 갈망하지만 소유하지 못했을 때에만 그곳에 존재한다. 사실상 소유의 불확실성에 사랑은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죽어가는 자아
인간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그 정체성이 훨씬 빠르게 변한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하는 자아는 매순간순간 죽고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영원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 파도 사이를 유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죽는다는 것도 기존에 것들과 다르지 않다. 그저 그 흐름 사이에 순응할 뿐이다. 오늘의 내가 내일 존재하지 않는 것은 둘 다 매한가지이다.
나아가 프루스트는 우리가 시간 너머에 존재하는 법을 말한다. 우리는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각에 집중해야 한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그 사이에 많은 자아가 변했더라도 같은 경험이 같은 감정과 감각을 불러 일으킬 때가 있다. 그런것들은 의식하지 않을 때 내면에서 떠오르는 것으로 우리의 존재가 시간에 걸쳐 존재하도록 한다. 또 예술에 집중하는 것은 그 작품이 담고 있는 감각과 요동을 함께 공유하는 것으로 수 많은 인생을 대신 살아보는 역할을 한다. 결국 다채로움을 만드는 것은 우리가 직접 감각하는 것이다.
9. Ludwig Wittgenstein -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가망없는 투쟁
대중이 철학을 바라보는 관점은 ‘심오한 질문을 연구한다.’ 따위와 같다. 철학자들이 내놓는 글귀와 작품이 수준 이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할 따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고상한 철학자들의 질문이 초점을 잘못 맞췄다고 말한다. 우리가 스스로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목메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 그 질문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물을 수 없는 질문을 의심하고자 한다면 회의주의는 반박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무의미한 것이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면 우리는 삶의 의미에 관해 논하지 ‘않는’ 대신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삶을 즐기는 동안에는 삶을 포기하기가 어렵다. ‘죄’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막연히 삶을 살고자 하는 것, 삶을 잘못된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면서 언어의 본질을 쫒아 탐구했다. 기존에는 언어가 현실을 재현하는 그림과 같은것으로 이해했다면 그는 더 확장된 해석을 내놓았다. 언어 자체가 객체로서 현실과 상호작용 한다는 해석이다. 우리가 물체를 어떤 단어로 정의하냐에 따라 물체간의 관계망이 새로운 구조를 창발할 수 있다. 또 단어들이 어떻게 집적성을 이루냐에 따라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또한 바뀔 수 있다. 어느 하나가 종속적인 형태가 아니라 동등한 지위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언어 표현의 의미는 우리가 하는 행동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온전히 본뜬 언어의 세상을, 이성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허황된 꿈이다. 악기소리의 의미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반이 튼튼한 믿음의 기반은 기반이 없는 믿음이다.
10. Albert camus - 세계의 부드러운 무심함
우리 인간이 의미를 갈구하도록, 무엇이든 이해하기를 갈구하도록 구성된 존재임에도 세계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다.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은 삶을 우리에게 의미 있도록 만들어주지 못한다. 이점은 비트겐슈타인과 대비되는 주장이다.
카뮈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원하는(원할 수밖에 없는) 것과 우리가 세계로부터 얻는(얻기를 바랄 수 있는) 것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는 상황을 가리켜 ‘부조리absurd’라고 부른다.